감상문/책

[내가 틀릴수도있습니다 -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를 읽고...

테리베리 2022. 12. 6.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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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내려놓기]
17년동안 승려로 살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17년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라는 의심을 품으며 조금은 거리를 두거나 우스갯거리 삼아 가볍게 접근한다면 자기답게 살아가기가 무한히 쉬워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무조건적으로 믿지 않을 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1. 자기 내면에 참된 친구이자 소중한 동반자를 두게 됩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가 되어 수시로 상처받습니다. 제 상처에 신경쓰느라 지혜로운 선택도 내리지 못하게 됩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는 삶에서 존엄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유는 또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그 생각은 대부분 의도치 않게 생갑니다. 우리는 생각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 자연 속에서 나만의 속도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 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자유를 쟁취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은 맞는 생각일까?

때때로 내면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문득 주위가 분명해집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마음의 소리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직관이라 부르지만, 저는 그것을 순간의 지성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일상 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끼는 겁니다. 정적의 순간을 찾는 것이지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의 관심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요란한 소리에 쏠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막장 드라마가 되어버립니다. 갈등에 끌리고, 불안과 불행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항시 현실과 투쟁하게 되지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성적인 마음은 하인이다. 반면에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다. 우리가 창조한 사회는 하인을 섬기느라 선물을 잊어버렸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일시적인 눈속임에 머무르기 쉽습니다.
우리 뇌는 애초에 부정형으로 즉, 무언가를 없애는 방향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해도, 생각을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면 앞으로의 삶에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유익할 것입니다.

 

[명상]
책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고요함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자기 안에서 평온과 고요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무척 끌렸습니다.

우리의 상반신은 일종의 물병과 같습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는 몸 안에 물이 차오른다고 상상해보세요. 숨을 내쉴 때는 수위가 내려가서 병이 비워집니다. 숨을 들이마실 떄는 물이 바닥에서부터 다시 차오릅니다. 호흡이 엉덩이에서 또는 더 바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상상해봅니다. 그런 다음 물이 배를 지나 가슴과 목까지 차오르는 기운을 느껴 보는 겁니다.
이 순간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순간 짜내야 할 기획안도 제시해야 할 의견도 없습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꼭 기억해야 하는 사항도 전혀 없어요. 여러분이 신경 쓸 일은 오로지 호흡 뿐입니다. 원하는 시간 동안 호흡에만 집중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 본연의 생기와 힘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면 일상적으로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한 번도 자기 몸을 드나드는 호흡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입니다.

명상을 진지하게 시도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분별있고 실용적인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지라도, 알고보면 대부분 사고 과정이 이리저리 날뛰는 서커스의 원숭이처럼 제멋대로 오락가락하는 생각들로 이뤄져 있다는 걸 말입니다. 많은 이가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는 마음이 금세 고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머릿 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생각일 뿐, 진신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아울러 내면에서 벌어지는 생각의 공예에 주목할 줄 아는 것은 유용한 기술입니다. 그래야 필요할 때 그런 생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생각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그 생각에 더 냉철하게 접근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 희안한 생각이 또 떠올랐군. 괜찮아 난 그 생각을 놓아버릴 거니까."

4일간 명상을 하며 내 생각과 홀로 마주하는 것, 그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진정시키려 애써도 제 마음은 끊임없이 인신공격과 자기회의로 반격을 가했습니다. 그 와중에 제 안에서 "더는 이런 식으로 살고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저 자신과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앞으론 일단 나 자신이 좀 더 견디기 쉬운 사람이 되는 거야. 내 본모습을 좀 더 편하게 대하는 사람, 내 생각에 지배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언젠가 나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어떻게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어느 정도 감은 있었고, 더는 제 인생이 통제할 수 없는 내부와 외부 상황에 전적으로 달린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선물이었습니다.

인생의 무상함 =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부처님이 준 두 번째 선물입니다.

명상을 지속하니, 여기저기 흩뿌려진 관심을 거둬들이고 선택한 곳으로 주의를 쏠리게 하는 것. 진정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것 뿐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준 세 번쨰 선물입니다.

 

[괴로울 때 ex. 인간관계 등]
왜 때로 사람들은 그토록 신경에 거슬리는 걸까요? 어떤 사람도 제가 기대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품었던 모든 반감은 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제 안에서 너그러운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제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여길 때 우리는 엄청난 기운을 소모하게 됩니다. 다행히도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을 그 모습 그대로 좋아하는 겁니다.

저는 늘 남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나치게 신경 쓰며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제가 그토록 열심히 일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게는 그처럼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누군가가 저를 미워할까 봐 그토록 두려워했는데, 이유도 모른 채 그리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미움을 받고나니 그제야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사려고 애쓰는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꺠우친 것입니다.

오늘 밤엔 여러분들에게 마법의 주문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떄, 누군가과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 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뇐다면, 여러분으 ㅣ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틀릴 수 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도 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며 좀처럼 놓지 못하는 어떤 생각이 불행감을 초래하는 겁니다. 이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생각은 "내가 그랬어야 했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함정에 빠지면 영원히 헤어나올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마구 날뛸 때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먼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멀어집니다. 그러고는 말하는 겁니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여러분의 마음을 누군가에게서 완전히 닫아버릴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의 세상은 분명히 더 좁아졌을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억울함의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밀어내려면 마음 어딘가에서 그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겁니다. 거기에 도달하면 갑자기 굉장히 많은 것들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갈 겁니다.

화난 적 있습니까? > 화가 나긴 하지만, 그 화는 아무 것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면을 전부 차지하고 물들이게 두지 말길 바랍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
토끼는 참 영리해. 게다가 토끼는 머리가 똑똑해. 그래서 토끼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나봐. 누구든 공감할 이야기일겁니다. 자기 생각의 안개에 갇힌 사람들은 현재에 관심을 온전히 쏟지 못하지요. 생각은 이리저리 뻗어나갈지언정 그들의 시야는 극히 좁습니다.
푸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각과 마음을 꺠우고, 매 순간의 새로움을 알아차리며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이들은 바로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제 말에 좀체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아요. 마치 제 말이 끝나자마자 뭐라고 대답할지 궁리하느라 바빠 정작 내용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 제가 무슨 이야기를 했든 보고서라도 되는 듯 계속 평가하고 검토하고는 그들의 세계관에 들어맞는 생각이나 관점만을 인정해주지요. 그런 관계에서는 전혀 마법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달리 말해서 그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따분하기 그지없지요.
반대로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을 땐 얼마나 좋은지요. 아무런 편견이나 판단 없이 귀를 기울이면 다른 사람은 둘쨰치고라도 먼저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내려놓기의 지혜는 참으로 심오합니다.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생각이 결국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옳다는 것이 결코 핵심이 아니라네. 우리는 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틉니다.

인간은 본래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는 못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습니다.

 

[무소유,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라]
내가 보기엔, 뭐가 있을 때보다 없을 때 더 정제된 형태의 행복을 맛보는 게 아닐까 싶네.
세상이 마땅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다 안다고 상상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의 모습이 제 생각과 맞지 않자 울컥한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저를 작고 어리석고 외롭게 만듭니다. 그런 기분을 잘 안다면, 다음과 같은 손독작을 연습해보길 바랍니다. 먼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힘을 빼고 활짝 폅니다. 간단한 동작이지만 우리가 유난히 집착하는 것을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보여줍니다. 저는 여러분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랍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되니까요.

나티코, 기적이 일어날 여지를 꼭 남겨두세요. 실제로 저는 모든 걸 통제하려 들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삶은 외롭고 고달프며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법인데 말이지요. 삶을 조금 더 믿고 맡겨야 했습니다. 삶에서 가장 좋았던 일들은 거의 대부분이 제 계획이나 노력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절한 계획을 반드시 세워야 할 때 조차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지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으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통제하고 예견하려는 헛된 시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럴 용기가 있다면 기적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거의 모든 인간을 지배하는 생각에든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과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각과 미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각이지요. 이 두 가지는 대단히 매혹적이며, 결국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바로 '내 인생'이라는 이름이지요. 이는 살아가는 내내 크고 무겁고 중요한 짐 두 개를 이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에는 과거에 관한 생각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미래에 관한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둘 다 멋지고 소중한 것들이 가득 든 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잠시 그 짐을 내려놓는다면 어떨까요? 인생에서 좀 더 가까이 당면한 순간,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을 반갑게 맞아보는 겁니다. 짐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언제든 원할 때 다시 집어 들면 됩니다.

생각과 통제력을 내려놓기, 내면을 돌아보고 경청하기, 현재에 집중하기, 정기적으로 편안하게 쉬기, 신뢰하며 살기.

결혼생활 이후 가져야 할 마인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질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항상 가질 수 있습니다.

나티코, 책무란 결국 현재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삶이 펼쳐지는 데 잘 대응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미래의 계획과 통제와 조직에 덜 신경쓰고 현재에 더 충실하면 됩니다.

순간에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은 닥치지도 않은 온갖 일에 대응할 방법을 궁리하면서 혹시나 잘못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숙고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갈지를 끊임없이 걱정하지도 않지요.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히 대응합니다. 더 현명한 방법이지요.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당명한 상황을 의식하려면 불화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 PPT발표 외워서 하는 듯한 느낌
오히려 어느정도 삶을 미리 계획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 계획이 반드시 결실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계획을 세우는 게 중요하지, 계획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도약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 이뤄집니다. 우리의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참아낼 수 있게 될 떄 우리는 가장 현명해집니다. 삶을 뜻대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자연의 속성입니다.

 

[변화의 두려움 앞에서]
제 안에서 뭔가가 속삭였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떄가 됐어!"
그런데 마흔여섯 살에 갑자기 제 안에서 집에 가야 할 때가 됐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잃을게 너무 많았습니다. 제 인생 전체와 정체성이 사원 생활과 얽혀 있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인데 인제 와서 손을 떼는 것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울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지금 당신은 그 무엇도 아닌 승려지요. 당신의 정체성이 그곳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밖에 나오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겁니다. 저 또한 그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과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그만한 용기가 제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불확실성에 직면하면서 다져진 자신감이 저를 충분히 지탱해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젠 저를 믿고 날개를 활짝 펴서 더 가혹한 현실로 뛰어오를 때가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와닿았던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요함 속에서 배운다. 그래야 폭풍우가 닥쳤을 떄도 기억한다."

지난 17년동안 돈을 만져보지도 않고 살았는데, 속세로 돌아오니 온 세상이 돈을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17년간 공을 들였는데, 겨우 이모양 이꼴이로군. 사실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저를 인간으로서 더 깊이 이해하고 계발하려고 인생의 절반을 바쳤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초월한 지혜의 빛을 가슴에 품고서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 인간의 욕심 > 속세를 떠나는 게 "언젠간 돌아와야 하는 곳"이라면, 돈으로 굴러가는 사회 안에 귀속되어야 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기에 더더욱이 떠나면 안된다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본성은 돌아온 뒤의 공백에 대해 그게 결과물이 아니라면 후회할테니까?

 

[사랑 결혼]
엘리사베트는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약 같은 사람]이지요.
무심코 서로의 상처를 물어뜯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상처는 어차피 다정한 알아차림의 빛 가운데로 이끌어야 합니다. 결국 그 순간조차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는 과정일 뿐입니다.

사랑은 우리 인간의 가장 취약한 점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래서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브라흐마위하라(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인 자애 / 연민 / 희열 / 평온)를 키우기 위해서는 > 항상 너 자신부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나의 가치 지키기]
사람들이 떠올리기만 해도 수치심을 느끼는 일들, 다른 사람들이 행여나 알까 두려운 일들은 모두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 짓입니다. 진정 무거운 짐이지요. 그 짐을 끌고 다니는 일상은 지난하고 괴롭습니다. 
그 대신 이 삶의 여정에서 어두운 과거가 너무 많지 않다면, 품위를 저버렸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너무 많지 않다면 어떨지 한 번 상상해봅시다. 그것이 자기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의 가치입니다. 
자기 마음과 몸이 당장 편하겠다고 진실을 회피하고 굽히고 왜곡하지 않는 것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면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어깨 위에 얹힌 무게가 줄어들게 되지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과 기억은 우리가 앉아 있는 목욕물과도 같습니다. 그 꺠끗함은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충동을 잘 조절할 만큼 마음을 연마한 사람, 또는 어떤 충동을 따르고 어떤 충동을 내려놓을 지 선별할 수 있는 사람을 보면 무척 흐뭇합니다. 자기 행동과 말에 책임지는 사람, 진실을 고수하고 규칙을 존중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일부러 해치치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열대의 밤하늘에 뜬 보름달처럼 구름 뒤에서 서서히 나타나 온 세상을 환히 비춰줍니다.

스캄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누구나 친구로삼고싶어하는 누라가 머리를 말릴 때 보는 거울 앞에 붙어있는 메시지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이들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없을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죽음을 가까이에서 접해야만 하는 지도 모릅니다(>이태원 참사..). 그 사실을 자기 존재로 꺠닫는 것은 인생 전체를 동원해도 이루기 어려운 과업이지요. 그래도 아깝지 않은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 제게 정말로, 진심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일 먼저 남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덜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러고 싶지 않을 때조차 저도 모르게 늘 그것부터 챙기긴 했지요. 반면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해졌습니다.

상황이 어땠으면 좋겠는지 또는 어떻게 될지를 곱씹는 대신 매 순간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사는 것 또한 어느 떄보다 중요해졌습니다.

 

[술]
네 번째 날 저녁, 치앙마이 시내에서 포도주를 한 병시켜놓고 뭐가 잘못됐는지 곰곰 생각했습니다.
 >> 진짜 멋진 술이란, 술에 잠해지는 것이 아니라 술을 잘 이용할 때인 듯 하다. 적당량의 포도주를 마시며 나의 생각을 글로 쓸 때라던지.. 영어 공부할 때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 마시고 울라불라 회화공부를 한다던지..

한 잔 안마실래? > 괜찮아 내가 속한 종파는 술을 마시지 않아 > 에이 뭘 그래 누가 알겠어~ > 내가 알겠지
메시지의 힘은 때때로 내용보다도 누구에게서 나왔냐에 달려있습니다. 함께 있을 때면 나 역시 마음이 곧아지는 신뢰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나온 이야기의 힘은 특히 막강합니다.

 

[승려의 삶]
승려가 지켜야하는 오계: 1. 살아있는 것을 해치거나 죽이지 않기 / 2. 남의 것을 훔치지 않기 / 3. 성행위를 삼가기 / 4. 거짓말하지 않기 / 5. 술 마시지 않기

승려의 마음가짐: 나는 당신과 함께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적으로 뛰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설사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과 함께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태국 숲속 사원은 현대인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결과적으로 내면의 소리를 피하려고 활용하는 오락물이나 대중문화에 접근할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기타]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면 장난기와 유쾌함, 익살스러움은 사라지고 행동거지는 점점 더 부자연스러워집니다. 말을 잃고 몸은 경직됩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아? 16년 동안 온갖 교육을 받았는데, 삶이 힘들 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배운 건 하나도 없다니!

스님에게 "믿음이 밥먹여주는 건 아니잖아요"에 반문 >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엔 알라신을 믿되 타고 갈 낙타는 묶어두라는 말이 있다.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히면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는 용어가 편치 않습니다. 한순간도 마음(mind)이 충만하다(full)고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늘 허전해서 누군가로 또는 뭔가로 채워졌으면 하는 공간이 남아돌고 있지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지금을 온전히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의식적 현존상태)으로, 알아차림(awareness)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태국 사람들은 제가 자란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훨씬 더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환영한다고 진심으로 확신하는 서양인은 별로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태국 사람들은 어떤 모임에 참석하더라도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될까, 나를 싫어하거나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자신을 환영해주리라고 확신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요. "어이 내가 왔어! 반가운 일이지! 내가 끼니까 더 즐겁잖아. 다들 내가 와서 기쁘겠지. 당연한 소리지만 다들 나를 좋아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그런 스스럼 없는 태도가 부럽고 좋았지요.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맺는 관계가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정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단점에 대해 웃어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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